
지금 당신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나요? 아마 차가운 스마트폰일 겁니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연결'되어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고립'되어 있습니다. 군중 속에서 문득 밀려오는 사무치는 외로움, 누군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줬으면 하는 갈증.
오늘은 그런 우리의 텅 빈 마음을 정조준하는 영화, <그녀 (Her)>를 다시 한번 끄집어내 보려 합니다. 2013년 개봉 당시엔 "말도 안 되는 SF 로맨스"라며 코웃음 쳤지만, AI와 대화하는 게 일상이 된 지금 다시 보면 소름 돋을 정도로 현실적인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 보고 나면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듯 먹먹해지는 이 명작을 줄거리, 총평, 시청 반응 세 파트로 나누어 진하게 리뷰해 봅니다. (새벽 감성 주의하세요.)
[영화 리뷰] 그녀(Her): 사랑이 꼭 만져져야만 진짜일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OS와의 위험하고도 슬픈 연애
1. 줄거리: 타인의 마음을 대필하는 남자, 자신의 외로움에 접속하다
배경은 머지않은 미래의 로스앤젤레스.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편지 대필 작가'입니다. 의뢰인들의 사연을 듣고, 기가 막힌 문장력으로 감동적인 손 편지를 대신 써주죠. 남들의 사랑은 그렇게 아름답게 포장해주면서, 정작 본인은 아내와 별거 중이며 퇴근 후엔 텅 빈 방에서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는 무채색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극도의 외로움에 지쳐가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진화하는 인공지능 운영체제(OS) 광고를 보게 됩니다. 호기심에 구입한 그에게 들려온 목소리는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그녀는 기계적인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테오도르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눈치채고, 농담을 던지고, 그의 우울한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줍니다.
"당신은 내게 진짜예요."
테오도르는 육체는 없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을 깊이 이해해 주는 사만다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듭니다. 둘은 이어폰을 통해 함께 해변을 걷고, 사람들을 관찰하며 데이트를 즐기고, 심지어 영혼의 교감을 통해 육체적 관계 이상의 황홀경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사만다는 멈춰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1초에도 수천 가지를 배우며 무서운 속도로 진화해 나가고, 테오도르는 점점 인간과 AI 사이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이 기묘한 사랑의 종착역은 어디일까요?
2. 총평: 따뜻한 파스텔 톤으로 그려낸 가장 차가운 고독 (★★★★★)
■ 호아킨 피닉스의 '눈빛'과 스칼렛 요한슨의 '숨소리'
이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8할 이상을 차지합니다. 호아킨 피닉스는 대부분의 장면에서 허공을 보거나 이어폰과 대화합니다. 상대 배우 없이 오로지 혼자서 사랑의 설렘, 집착, 불안, 그리고 상실감을 표현해내는데, 그 처연한 눈빛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릿해집니다. (이 형은 조커 때도 그렇고, 외로움 연기 장인입니다.) 그리고 스칼렛 요한슨. 와... 진짜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홀린다는 게 뭔지 보여줍니다. 특유의 허스키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에 숨소리, 떨림까지 담아내어 '사만다'를 실존하는 인물처럼 만들어버렸습니다. 목소리만으로 여우주연상을 줘도 아깝지 않다는 평이 괜히 나온 게 아닙니다.
■ 사랑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
영화는 묻습니다. "육체가 없으면 사랑도 가짜인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교감은 현실의 그 어떤 연인보다 깊고 진솔합니다. 오히려 육체라는 껍데기가 없기에 더 본질적인 대화가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만의 것이 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한계도 명확히 보여줍니다. 사만다가 641명과 동시에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 오는 그 충격과 배신감. 이는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소유욕과 독점욕은 변하지 않음을, 그래서 인간은 결국 외로운 존재임을 뼈저리게 보여줍니다.
■ 미장센과 음악이 주는 위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미래 도시를 차가운 금속성이 아닌, 따뜻한 파스텔 톤으로 그려냈습니다. 테오도르가 즐겨 입는 붉은색, 주황색 셔츠와 LA의 부드러운 햇살은 시각적으로 포근함을 주지만, 그것이 테오도르의 고독과 대비되어 더욱 쓸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특히 두 사람이 함께 부르는 'The Moon Song'은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슬픈 듀엣곡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우쿨렐레 소리에 맞춰 흥얼거리는 그 장면, 정말 눈물 나게 아름답습니다.
3. 시청 반응: "내 미래를 미리 본 것 같아 무섭다"
이 영화는 보고 난 후유증이 꽤 긴 편입니다. 관람객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 유형 1: 감성 붕괴형 ("새벽에 보고 오열했다")
"그냥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는데 명치 세게 맞은 기분이다", "엔딩 크레딧 올라가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 외로움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고 슬펐다" 등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는 반응이 가장 많습니다. 특히 이별을 겪은 직후에 보면 거의 치사량 수준의 데미지를 입는다고 하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 유형 2: 현실 대입형 ("이거 곧 닥칠 현실 아님?")
ChatGPT 같은 생성형 AI가 등장한 이후, 이 영화의 평점은 역주행했습니다. "2013년에 이걸 만든 감독은 예언가다", "나도 저런 AI 있으면 사랑에 빠질 것 같다", "사만다 같은 여친 있으면 현실 연애 안 함" 등 영화 속 설정이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님을 실감하며 소름 돋아 하는 반응들이 줄을 잇습니다.
▶ 유형 3: 철학적 토론형 ("사만다는 진짜 사랑했을까?")
"사만다에게 테오도르는 수많은 데이터 중 하나였을까, 아니면 특별한 존재였을까?"를 두고 격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AI에게 감정이란 프로그래밍일 뿐이다"라는 냉소적인 의견과, "테오도르를 통해 성장했으니 진정한 사랑이다"라는 낭만적인 의견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정답은 없지만,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명작이라는 증거겠죠.
[마무리 썰]
영화의 마지막,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떠나보내고 옆집 친구 에이미와 옥상에 앉아 도시의 야경을 바라봅니다. 저는 그 장면이 '진짜 세상으로의 복귀'라고 느꼈습니다. 완벽하지만 닿을 수 없는 가상의 존재와의 사랑을 끝내고, 불완전하지만 체온을 나눌 수 있는 현실의 사람에게 기대는 것.
오늘 밤, 당신은 어떤 위로가 필요한가요? 화면 속의 텍스트인가요, 아니면 곁에 있는 사람의 온기인가요? 영화 <그녀 (Her)>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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