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리뷰] 헤어질 결심: 마침내, 붕괴됨으로써 완성된 안개 속의 사랑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산에서 시작해 바다로 사라진, 꼿꼿했던 남자의 추락과 여자의 사랑.
안녕하세요. 영화의 여운을 기록하는 블로거입니다. 오늘은 제75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를 매혹시킨 박찬욱 감독의 수사 멜로극,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박찬욱 감독이라고 하면 보통 <올드보이>나 <아가씨> 같은 파격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릅니다.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이, 서로의 숨소리와 눈빛, 그리고 미묘한 대사의 파동만으로 관객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듭니다. 수사극의 탈을 쓴 가장 우아하고 슬픈 로맨스, 이 영화의 매력을 줄거리, 심층 총평, 그리고 글로벌 성적을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1. 줄거리: 산에서 온 여자, 바다를 품은 남자
사건은 안개가 자욱한 도시 부산, 한 남자가 산 정상에서 추락해 사망하면서 시작됩니다. 예의 바르고 청결하며, 최연소 경감으로 승진할 만큼 유능한 형사 '해준(박해일 분)'은 사망자의 아내 '서래(탕웨이 분)'를 조사하게 됩니다. 남편이 죽었음에도 전혀 놀라거나 슬퍼하는 기색 없이 "마침내 죽었네요"라고 말하는 그녀. 해준은 직감적으로 그녀를 용의선상에 올립니다.
해준은 수사를 위해 서래의 집을 잠복 감시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봅니다. 하지만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외로움과 기묘한 동질감에 해준은 점차 빠져들게 됩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해준은 서래의 곁에서만 깊은 잠에 들 수 있었고, 서래 역시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배려해 주는 해준에게서 난생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해준은 결정적인 단서를 통해 서래가 진범임을 알게 됩니다. 형사로서의 자부심과 원칙이 전부였던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무참히 무너져 내립니다. 그는 서래에게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라는 말을 남기며 증거가 담긴 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조언한 뒤 그녀를 떠납니다.
시간이 흘러 안개의 도시 '이포'로 전근을 간 해준 앞에, 재혼한 서래가 또 다른 살인 사건의 연루자로 나타납니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묻는 해준에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라고 되묻는 서래. 두 사람의 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서래는 해준에게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기 위해 스스로 '헤어질 결심'을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2. 총평: "사랑해"라는 말 없이 완성된 사랑의 언어
① 언어의 장벽이 만들어낸 미묘한 서스펜스
이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지점은 바로 '언어'입니다. 중국인인 서래가 구사하는 한국어는 서툴지만, 사극 드라마를 통해 배운 탓에 묘하게 문어체적이고 고풍스럽습니다. "마침내", "붕괴", "단일한" 같은 단어들은 탕웨이의 목소리를 통해 낯선 울림을 줍니다. 이는 해준과 서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면서도,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더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매혹적인 장치가 됩니다. 특히 번역기를 통해 오가는 대화 속 시차와 오역은 두 사람의 엇갈리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② 박찬욱의 미장센, 그리고 '청록색'의 세계
영화는 내내 짙은 안개와 함께합니다. 그리고 서래의 원피스나 벽지 등 영화 곳곳에 쓰인 색은 파란색 같기도 하고 초록색 같기도 한 모호한 '청록색'입니다. 이는 산을 좋아하는 인자한 남자(남편)와 바다를 좋아하는 지혜로운 남자(해준) 사이의 경계이자, 서래라는 인물의 알 수 없는 속내를 시각화한 것입니다. 줌인, 줌아웃을 과감하게 사용하는 카메라 워킹과 스마트폰 화면을 활용한 독특한 시점 샷은 "역시 박찬욱"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③ 사랑의 타이밍에 대한 잔혹한 탐구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영화의 핵심을 관통하는 이 대사는 두 사람의 비극적인 타이밍을 완벽하게 설명합니다. 해준이 형사로서 붕괴되면서까지 그녀를 살려준 것이 사랑 고백이었음을 서래는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해준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는 미제 사건이 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려 합니다.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서래의 선택은 영화 역사상 가장 슬프고도 충격적인 엔딩 중 하나로 기억될 것입니다.
3. 글로벌 성적 및 반응: 전 세계가 앓은 '헤결' 신드롬
-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 2022년 제75회 칸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겨주었습니다. 경쟁 부문 상영 직후 외신들로부터 "히치콕의 재림",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받으며 평점 1위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 '헤친자' 팬덤의 탄생: 국내 흥행 성적은 약 190만 명으로 초대박 흥행은 아니었지만, 이 영화는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습니다. 영화를 반복 관람하는 'N차 관람' 열풍이 불었고, 일명 '헤친자(헤어질 결심에 미친 자)'라 불리는 마니아층이 생겨나며 대본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현상을 낳았습니다.
- 해외 평단의 끊이지 않는 호평: 뉴욕타임스, 가디언, BBC 등 영미권 유력 매체들이 선정한 '2022년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렸습니다. 비록 아카데미 시상식 최종 후보 지명에는 실패했지만, 이를 두고 현지 언론들이 "범죄적인 무시(Criminal Snub)"라고 비판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마무리하며]
<헤어질 결심>은 곱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영화입니다. 처음 볼 때는 서스펜스가 보이고, 두 번째 볼 때는 해준의 사랑이 보이고, 세 번째 볼 때는 서래의 슬픔이 보입니다.
파도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짙은 여운에 젖고 싶은 날,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이면 여러분도 자신도 모르게 '붕괴'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모든 연인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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